김치의 사랑 고백

                                                                    류해욱  신부


  김치가 김치만두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사랑고백을 했을까요?
  “네 안에 내가 있다.”
  이 기가 막힌 유머의 원조가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아버지와 당신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이기에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14장에서는 당신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  
  여러분들, 가수 비가 자기를 소개하면서 뭐라고 하는지 아시지요?
  “나비야.”
  예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소개하시면서 뭐라고 하실까요?
  “나, 너야.”
  (손우배 신부님이 며칠 전에 올린 '이 안에 너 있다.'와 일맥상통)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머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밥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밥이 되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사시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이 진정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겠지요. 오늘은 제가 [사랑이 없으면 우린 아무 것도 아니라네]라는 수상집에 썼던 글 하나 나누오니, 이미 읽어보신 분들도 그냥 함께 있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께 묻지요.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문득 ‘존재(being)'과 ‘행함(doing)'이라는 두 단어가 떠올라 거기 머물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행함(doing)’의 철학이 몸에 밴 우리의 사고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그렇지요. 근면의 덕이 강조되고, 능력이 경쟁 사회에서 성공의 척도이지요.
  그렇다면,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존재 가치가 없는가? 예를 들어, 팔 다리가 없는 사람, 중환자실에서 반신불수로 누워 있는 사람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아니면, 가치의 질에서 떨어지는가? 하느님 보시기에 어떤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행하기 때문일까? 과연, 하느님의 일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행함(doing)’의 철학이 우리 몸에 깊이 배어있는 것을 아닐까? 등등의 생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대부호였던 데일 카네기는 아직 젊은 시절 경제 불황이 미국을 강타했을 때, 시작했던 사업은 완전히 망했고,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깊은 절망감에 빠진 카네기는 삶에 종지부를 찍고자 결심하고 집을 나왔답니다.
  뉴욕에 살던 그는 허드슨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마음먹고 강을 향해 걷고 있는데 한 남자가 소리쳐 그를 불렀답니다. 뒤돌아보니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제대로 된 휠체어도 아닌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답니다.
  “선생님, 연필 한 다스만 사주시겠습니까?”
  카네기는 주머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1달러짜리 지폐를 건네주고 돌아서서 강을 향해 걸어갔답니다. 그 남자가 카네기에게로 굴러오면서 소리쳤답니다.
  “선생님, 연필을 가져 가셔야죠.”
  카네기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지요.
  “됐습니다. 나는 이제 연필이 필요 없는 사람이오.”
  그런데 그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두 블록이나 따라오면서 연필을 가져가든지, 아니면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는 동안 내내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답니다. 마침내 연필 한 다스를 받아든 카네기는 자신이 더 이상 자살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섰답니다.

  훗날 카네기가 말했지요.
  “저는 제가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다리가 없으면서도 미소 짓고 있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미소 지은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어 넣은 것이지요.
  ‘행함(doing)’의 철학을 살던 젊은 카네기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자신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존재였지요.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존재(being)가  ‘행함(doing)’보다 먼저이어야 하지요.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행함’이라기보다는 그냥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미소를 짓고 있는 존재가 바로 믿는 사람의 모습이지요.

  저는 어제 봉성체를 하여 드리기 위해 병실에 갔다가 머리를 굵은 철사로 고정시켜 놓아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환자를 만났는데 그 환자는 아주 밝게 미소 짓고 있었고,  봉성체를 하여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저에게 눈웃음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현현이었고, 그 미소와 눈웃음은 저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는 하느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존재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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